"우후 우후 우 후우후 우우우우"
문자로 쓰긴 애매하지만, 그녀가 가르쳐준 침팬지들 간의 '안녕 잘 지냈니?'라는 뜻의 인사말이다. 애써 따라 해 보았지만 도통 침팬지들은 못 알아들을 것 같은 소리만 냈다. 반면 그녀가 시범을 보인 소리는 마치 아름다운 암컷 침팬지의 사랑의 인사처럼 들렸다. 인생을 바쳐 침팬지를 연구하면서 번호표가 아닌 이름을 모두 붙여줄 정도로 애정을 갖고 침팬지와 가족처럼 살아온 그녀가 침팬지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제인 구달 (Jane Goodall) 박사는 한국인에게 민감한 개고기 식용 문제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돼지도 개만큼 영리하고 사람의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개를 먹는 것이 돼지를 먹는 것보다 나쁘다는 윤리적인 근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동물이건 우리가 먹어야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그들을 잘 대해주며 얼마나 자비롭게 그들을 죽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이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 동물에 대한 연민이 묻어나는 이 한마디는, 그녀가 돌아간 후에도 또 다른 방식으로 동물의 삶을 생각해보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고령의 나이에도 일 년에 3백 일은 꼬박 전 세계로 강연을 다니며 힘주어 내는 목소리는 한 가지다. 인간과 동물과 자연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 그러기 위해 알아야 할 '생명을 사랑하는 방법'을 그녀는 속삭인다. 동물과 함께한 그 인생 속으로 이제 스며들어보자.
한 살 반에 지렁이랑 놀고, 11세에 타잔을 사랑하고
"저는 런던에서 태어났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살아있는 것에 호기심이 많았는데 어머니는 이런 저를 격려해 주었어요. 만 두 살이 안되었을 때 어머니가 방에 들어오셨는데 제가 지렁이를 한 움큼 쥐고 관찰하고 있었대요. 다리가 없는데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 그것이 궁금했었나 봐요. 그런데 어떤 어머니 같았으면 아유 징그러워. 내다 버려! 이럴 수도 있겠지만, 제 어머니는 그렇게 방에다 두면 모두 죽을 거라면서 마당에서 함께 관찰해 주었어요."
"몇 년 후 저는 농장이 있는 시골에 가게 됐는데 참 좋았어요. 런던에선 동물을 보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때는 닭을 좁은 우리에 가두지 않고 마당에 풀어서 길렀는데 자유롭게 노는 게 참 보기 좋았어요. 제가 맡은 일은 매일 달걀을 수집하는 일이었는데 궁금한 것이 또 생겼어요. 아무리 봐도 달걀이 나올 만큼 큰 구멍이 없는데 어디로 나오는 걸까? 어른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제 호기심을 충족시킬 대답은 아무도 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직접 알아내기로 했죠. 닭장 안 지푸라기 밑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온 가족이 동네방네 찾아다니다가, 한참 후에야 어머니가 지푸라기를 쓰고 닭장에서 나오는 절 발견하셨어요. 그 순간, 어떤 어머니는 도대체 뭐한 거야? 다시 한번만 그러면 혼내줄 거야! 하고 겁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제 어머니는 저랑 마주 앉아서 달걀이 어디로 나오는 것인지, 제가 얘기하는 것을 죄다 들어주셨어요. 그게 동물을 관찰하게 된 첫 번째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열한 살 때 타잔 소설을 읽으면서 타잔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어요. 타잔의 부인인 제인이 미웠어요. 내가 훨씬 훌륭한 타잔의 부인이 될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죠. (웃음) 그렇게 자라면서 전 동물을 관찰하고 책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어요.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네가 무슨 돈이 있니. 허황된 꿈은 버리고 네가 이룰 수 있는 꿈이나 꾸라고 했습니다. 하긴 그때 전 차는 고사하고 자전거도 못 살 처지였거든요."
"하지만 제 어머니는 달랐어요. 언제나 꿈을 갖고 기회가 나타나면 놓치지 말아라. 포기하지만 않으면 이룰 것이라고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던 중 케냐에 있는 친구가 저를 초대했어요. 다섯 달 동안 식당 종업원 일을 해서 경비를 마련해 케냐로 갔어요. 그곳에 갔을 때 친구가 그러더군요. 이곳에 고 생물학자 루이스 리키 박사가 있는데 네가 정말 그 일을 하고 싶으면 그분을 만나보라고요."
"그래서 그분을 찾아갔지요. 그분은 박물관을 돌면서 제게 동물에 대한 많은 질문을 하셨어요. 전 대부분의 답을 할 수 있었고 리키 박사는 탕가니카 호수 근처의 침팬지를 연구할 기회를 제게 주셨어요. 대학도 안다녀 학위도 없는 제게 말이죠. 다행히 한 미국 기업인이 6개월 연구비를 지원해주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탄자니아의 영국 관계자가 허락을 쉽게 해주지 않는 거예요. 젊은 여자가 숲 속에서 혼자? 그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결국엔 동행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아냈는데 그때 정글로 두말없이 동행해준 사람이 바로 제 어머니예요. 그렇게 침팬지들과의 생활이 시작된 겁니다."
내리는 비를 손끝으로 만지며 사색에 잠기는 침팬지 친구
그렇게 해서 곰비 국립공원에 도착한 것이 1960년. 그녀 나이 26세였다. 한창 이성이나 외모에 신경 쓸 아가씨가 침팬지를 연구하겠다고 무시무시한 정글로 겁도 없이 뛰어든 것이다. 침팬지들은 처음 보는 외지인에게 상당한 경계를 표했다.
"저를 건너편 계곡에서 보고도 도망을 갔어요. 저 흰 원숭이가 누구냐 하면서요."
침팬지들과 친해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곳의 주민들과 어울리는 것도 수월한 연구를 위한 과제였다. 그때 나선 것이 또 어머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작은 진료소 같은 것을 만들어놓고, 동네 사람들에게 밴드니 아스피린 같은 것들을 주면서 친해졌다.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저는 비로소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망원경으로 침팬지들을 관찰할 수도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뭘 알아내지 못하면 연구비를 받을 수 없게 될 테니까 차츰 초조해졌어요."
그러기를 4개월. 이렇다 할 진전이 없어 애를 태우던 그녀에게 기적이 일어난다. 늘 경계만 해오던 수컷 침팬지 하나가 그녀의 손에서 바나나를 받아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침팬지가 그녀를 그들의 세계로 인도하고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회색 수염을 가졌다고 해서 데이비드 그레이 비어드란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침팬지 세계에 관한 첫 번째 발견도 그 친구가 선물한 것이다.
"잎사귀를 가지고 흰개미 굴에서 사냥을 해 먹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또 나뭇잎을 다 떼어내고 잔가지만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들은 도구 이용뿐 아니라 만들 줄도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녀가 발견한 것은 인간만이 도구를 쓴다는 그간의 통념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녀가 본 침팬지들은 참 똑똑했다. 곰비 국립공원에서만 해도 9개의 서로 다른 도구를 사용하는 케이스가 알려져 있는데, 돌로 나무 열매를 깨 먹기도 하고 종려나뭇잎을 절구질해서 부드러워진 부분을 먹기도 했다. 뿐만 아니었다. 그들은 수컷 중심의 계급 사회를 이루는데 집단생활 방식이나 가족 관계가 신기할 정도로 인간과 흡사했다.
"침팬지 사회는 철저한 계급사회인데 지위가 높은 침팬지가 겁을 주면, 낮은 침팬지가 가서 애걸하는 행위를 해요. 그럼 높은 침팬지가 돌아서서 다독거려주죠. 암컷은 야생에서 열두 살이 넘어야 첫 아이를 갖게 되는데, 어린 침팬지들은 여러 놀이를 하느라 굉장히 부산해요. 인간이 오랫동안 부모 곁에서 사회생활을 배우듯이 어린 침팬지들도 부모 침팬지나 누나, 형 침팬지 곁에서 5년 동안 여러 가지를 배우죠."
어른 침팬지들은 자식이 아닌 어린 침팬지들도 대체로 잘 보살펴 주는데 곰비 공원에는 부모를 잃은 새끼를 친척이 아닌 열네 살 된 수컷 침팬지가 입양해 키우고 있다. 그녀가 본 침팬지들은 이런 행동 양식뿐 아니라 다양한 감정도 갖고 있었다.
"우리와 다르지 않아요. 어린 침팬지들은 주변에 대한 호기심이 많죠.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호기심에 차서 폭포수 밑에서 20분 동안 춤을 추기도 해요. 누가 병에 걸리면 모두가 걱정을 하는데 특히 사람처럼 어미가 더 그래요. 가족 중에 누가 죽으면 모두 애통해하죠. 심지어는 식음을 전폐하고 부모를 따라 죽는 새끼도 있어요."
몸이 아프면 사람이 쓰는 약초를 찾아 먹는 똑똑한 침팬지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녀는 일생을 바쳐 살펴온 침팬지들이 우리 인간과 너무 닮아 있어서 이런 침팬지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얼마나 비극일까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맘과는 달리, 그녀의 눈에 비친 숲은 안타깝게도 점점 줄어간 가고 황폐화되어가고 있다.
본 기사는 본인이 작성하였으며, 글이 길어 다음에 이어서 작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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